본문 바로가기
뉴스, 이슈

[기억하자] 세월호..

by 프로뚱땡이 2020. 4. 17.

 

#세월호 #6주기 #참사 #기억할게

 

 

어제, 4월 16일은 #세월호 #6주년째이다

 

2014년 4월 16일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처음 건조된 여객선 객실을 증설 하여 운행하던 배가 진도 부근에서 침몰한 사고로

승객정원도 늘리고, 화물과적, 고박불량, 무리한 증축, 운전미숙등으로

그 해 최악의 사고라고 전 세계에서 기억하고있다.

이 사고로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생존했고, 304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으며

특히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중이라 어린 아이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

 

거기에 선장은 본인의 목숨만 살기 급급해 도망가고 학생들은 안에서 대기하라는 방송만 믿은채

4월, 아직 수온이 오르지도 않은 차가운 바닷속으로 아직 피우지도 못한 많은 꽃들이 져버렸다

 

 

당시 승객 300여 명을 내버려 두고 배에서 탈출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준석 선장 등 선원 15명은 2014년 5월 재판에 넘겨졌으며

2015년 11월 대법원은 이준석 선장 무기징역,

나머지 선원에게는 1년 6개월 부터 12년을 선고했다.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으나 퇴선 유도를 하지 않은

김경일 해경 123정 정장은 2015년 11월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RotoRl 세월호 이준석 선장

 

 

약 7개월에 걸친 수색작업은 종료되었고 사망자 295명, 미수습자 9명으로 남았다

유족들은 수색종료 후 빠른 인양을 원했으나 결국 1년이 지난 2015년 4월 11일에 육지로 올라왔다

9명의 미수습자중 4명을 배 안에서 찾아냈지만 결국 남은 5명은 찾지 못했다

 

아래 내용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올라온 내용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문제점들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

세월호 출항 예정시각이었던 2014년 4월 15일 저녁 6시 30분 인천항엔 안개가 자욱해 많은 선박들이 출항을 포기했으나, 세월호만 2시간 30분 늦게 출항했다. 또 세월호는 안전점검표에 차량 150대·화물 657톤을 실었다고 기재했지만, 실제로 실린 화물은 차량 180대·화물 1,157톤으로 무리한 화물을 적재했다. 이와 같은 과적 화물은 세월호가 급격한 변침으로 복원력을 잃은 핵심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했다.

진도 VTS 관제 허술, 초기 대응시간 허비

세월호는 급선회로 배에 이상이 생긴 이후, 사고 수역 관할인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가 아닌 제주 VTS에 최초 신고를 해 초기 대응시간을 허비했다. 더욱이 세월호가 진도 VTS 관할 수역에 4월 16일 오전 7시 7분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진도 VTS는 세월호의 관할 해역 진입 사실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고를 받고 사고 해역으로 출동한 해경은 여객선 안에 300명 이상의 승객이 남아있음에도 배 밖으로 탈출했거나 눈에 보이는 선체에 있는 승객들만 구조했을 뿐 세월호 내부로는 진입하지 않는 소극적 구조로 일관했다.

승객 버리고 탈출한 선원들의 무책임함

세월호 운항관리규정에서는 인명구조 등 비상상황이 발생 시 선장은 선내에서 총지휘를 맡아야 하고, 승무원은 각자 역할을 맡아 탑승객 구조를 도와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선장을 비롯한 선원 대부분은 침몰 직전까지 탑승객에게 객실에 그대로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자신들은 배 밖으로 나와 해경 경비정에 의해 제일 먼저 구조됐다. 특히 세월호가 침몰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조류가 빠르다는 위험천만한 맹골수도(孟骨水道)였지만, 이 지역의 운항을 지휘한 사람은 입사 4개월째인 3등 항해사로 드러났으며, 더욱이 이곳을 통과할 때 선장은 조타실을 비운 것으로 드러났다.

허둥댄 정부, 초동 대처 실패

해양수산부는 사고 발생 후 즉시 중앙사고수습본부를 세우고 범 부처 총괄업무를 시작했으나, 곧 관련 업무를 안전행정부의 중앙재난대책본부(중대본)에 넘겼다. 하지만 중대본은 사고 현장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수차례에 걸쳐 잘못된 정보를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여기에 경기도교육청도 세월호 침몰사고 직후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는 잘못된 공지로 공분을 일으켰다.

여기에 해수부·교육부·해양경찰청 등이 별도의 사고대책본부를 꾸리면서 사고 관련 대책본부만 10여 개에 달했다. 총리실은 중구난방

뒤늦은 구조 작업 돌입

세월호가 선수를 제외하고 사실상 완전히 침몰된 시간은 오전 11시 20분 정도였는데, 세월호 실종자 수색을 위해 잠수요원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것은 사고가 난 지 8시간이 지난 4월 16일 오후 5시 정도였다. 특히 사고 발생 첫날인 4월 16일은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았지만, 처음 수백 명의 구조요원이 투입되었다고 알려진 바와 달리 수중수색은 3차에 걸쳐 16명이 투입되는 데 그쳤다.

또 세월호는 사고 초기 선체가 왼쪽으로 기울어졌지만 3분의 2 이상이 해상에 떠있는 상태를 상당 시간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구조장비의 빠른 투입이 필요했다. 그러나 선체 부양을 위한 리프트백 투입은 4월 18일에야 이뤄졌고, 야간구조작업을 위한 오징어잡이 어선은 침몰 나흘째, 잠수부들의 이동을 돕는 대형바지선은 침몰 5일째인 4월 20일에야 뒤늦게 투입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4·16 세월호 참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이 문제들을 이유로 2019년 11월 세월호 특별수사단을 설치하여 재수사가 시작되었다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뉘우치지못해 내 목숨, 나 하나 지키기 위해 간직한 흉악한 비밀들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슬픔을 등돌리고도 지금 끼니때마다 나오는 밥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화가난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꼭 죽을때까지 매일매일 뉘우치고 반성하는 꿈을꾸며

희생자의 저주속에서 한순간도 편하게 잠못자길 간절히 바란다

 

댓글